하인리히 하러 별세...파란만장한 93년의 삶 브래드 피트가 주연했던 영화 <티벳에서의 7년>의 실제 인물인 알프스 등반가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가 1월 7일(현지시간) 토요일 93세의 나이로 숨졌다. 여행가이자 연구가, 산악인이자 작가, 그리고 무엇보다 달라이 라마의 교사이자 친구로 유명했던 그의 죽음에 오스트리아는 슬픔에 빠졌다.
지난 5일 중태에 빠진 하러는 캐른튼의 프리사크 종합병원으로 옮겨졌으나 7일 새벽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장례식은 오는 14일 하러의 고향인 휘텐베르크에서 치러진다. 볼프강 쉬셀 총리와 캐른튼 주지사 요르그 하이더는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아이거 북벽 등정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하러는 1939년 독일 히말라야 탐험대의 낭가 파르밧(Nanga Parbat) 등정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탐험대는 낭가 파르밧에 다다르지 못하고 대신 디아미르(Diamir) 벽을 통해 정상에 오르는 새로운 루트를 발견했다. 등반을 마치고 돌아오는 9월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영국군 포로가 된 하러는 포로수용소에 머무르는 동안 4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다 실패한 뒤 5번째에 이르러 수용소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1997년 장 자크 아노 감독이 브래드 피트를 캐스팅해 그의 소설 <티벳에서의 7년>을 영화화하면서 하인리히 하러는 다시금 새로운 세대들로부터 명성을 얻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의 감춰졌던 과거도 드러났다. 90년대 말 언론과 미디어는 그가 젊은 시절 친 나치 성향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하인리히 하러는 그러나 "나는 나치친위대의 멤버로서 어떠한 행위도 한 적이 없고 1950년대 초반 티베트에서 귀향했을 때 이미 그라츠경찰서에서 그것에 대해 심문을 받았다"며 "내가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음을 더 이상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하러는 고국인 오스트리아에 돌아온 후 <티벳에서의 7년>을 비롯, <부탄을 생각하며> 등의 소설과 <나의 인생>이라는 자서전을 쓰는 등 글쓰기를 통한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또한 고향인 휘텐베르크에 '티베트박물관'을 건립했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제 3세계로의 여행을 통해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 인권운동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티벳에서의 7년,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
"<티벳에서의 7년>이 내 삶을 바꿨다"
▲ 하인리히 하러의 사망을 보도한 오스트리아 일간지들.
ⓒ 배을선
93년이라는 그의 긴 삶은 대부분 도전과 모험의 연속이었다. 나치친위대 멤버였던 과거의 행적이 드러나면서 그의 세계적 명성이 타격을 받기도 했지만 노령의 고백을 접한 오스트리아인들은 오히려 그가 오스트리아인임을 자랑스러워했다. 이제 또 다른 세상으로의 여정을 떠난 하인리히 하러의 삶을 뒤돌아본다.
파란만장했던 삶, 그리고 티베트에서의 7년
오스트리아인들은 말한다. "어떤 오스트리아인도 하인리히 하러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지 못했다"고. 1912년 7월 6일 휘텐베르크에서 우체국 직원의 아들로 태어난 하인리히 하러는 그라츠에서 스포츠와 지리학을 전공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서 산악안내자로 일했으며 겨울에는 스키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선수로 1936년 올림픽에 참가한 하러는 개막식 때 오스트리아 국기를 들고 입장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그는 의지가 강하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며 또한 재주가 많았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1938년 마지막 국가시험을 치른 후 같은 날 스위스의 그린덴발트(Grindenwald)로 산악등정을 떠났다. 비엔나 출신인 프리츠 카르파렉, 독일 출신인 안데를 헥마이어와 루드빅 푀어그와 함께 그는 7월 24일 2000미터 높이의 스위스 아이거 북벽을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아이거 북벽은 그 당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등반가들이 실패한 장소였다.
▲ 하러가 쓴 베스트셀러 <티벳에서의 7년>.
ⓒ Ullstein
친구 한명과 함께 1944년 4월 29일 수용소에서 탈출한 하러는 티베트까지 20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21달 동안 걸어갔다. 1946년부터 1951년까지 7년을 티베트에서 머무른 하러는 어린 달라이 라마의 조언자이자 교사로 인연을 맺었고, 1953년에는 그의 경험담을 기록한 책 <티벳에서의 7년>을 출간해 작가로서 다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하러는 그 이후 연구자로서 남미, 그린란드, 알래스카, 아프리카, 하와이, 카이티, 그리고 뉴기니 등을 여행했으며 여행하는 곳곳에서 30여 개의 정상을 등정했고 파푸아뉴기니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네팔, 수리남, 프랑스령 가이아나, 수단 그리고 보르네오를 두루 여행한 하러는 1982년 오스트리아로 귀항한 후 한 번 더 티베트를 방문했으며 같은 해에는 부탄을 여행했다.
그러나 그의 세계적인 명성이 언제나 순탄대로를 밟았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씁쓸한 시련이 있었다.
명성과 함께 드러난 나치친위대 전력
▲ 장 자크 아노 감독,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티벳에서의 7년>.
언론의 의혹이 짙어지자 백발의 하러는 대중들 앞에 서서 자신의 과거를 시인했다. 그는 APA와의 인터뷰를 통해 "1938년 아이거 북벽 등반에 성공했을 때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환영접대와 개인적 헌정의 사진을 받음으로써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당(NSDAP)뿐 아니라 악명 높기로 유명한 나치친위대(SS)와 인연을 맺었다"고 밝혔다.
흔히 SS(Schutzstaffel)로 불리는 나치친위대는 1925년 아돌프 히틀러가 만든 소규모 개인경호대로 나치 세력이 커짐에 따라 그 권력과 범위도 넓혀갔다. 처음에 300명도 안되었던 인원은 1933년 5만 명을 돌파했다. 나치친위대 출신들은 SA(Sturmabteilung)로 불리는 나치돌격대보다 우월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정치범, 집시, 유대인, 폴란드 지도자, 공산당 간부, 게릴라 저항군, 소련 전쟁포로들을 대량 학살해 악명이 높았다. 나치친위대가 되기 위해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완벽한 신체와 순수한 혈통을 가져야만 했다. 지리학을 전공한 엘리트이자 여행등반가였던 하인리히 하러는 나치친위대의 멤버가 될만한 월등한 조건을 갖고 있었던 셈.
▲ 하러의 소설 <부탄을 생각하며>.
ⓒ Herbig
오스트리아인들은 하러의 자백에 "노령의 나이에 부끄러운 고백을 하기는 쉽지 않다"며 그의 행동을 "매우 용기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미디어와 여론은 "그가 나치친위대 소속이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자백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 하인리히 하러는 전혀 부끄러운 오스트리아인이 아니다"고 평가했다.
하러는 또한 APA와의 인터뷰를 통해 나치친위대 멤버였다는 이유로 살아가는 동안 많은 고통과 협박을 받았음을 고백했다. 하러의 나치친위대증명서를 손에 넣은 그의 학교동문은 당시 3만 쉴링(약 270만원, 지금의 2180유로에 해당)을 요구했다. 하러는 그에게 차라리 증명서를 경찰서에 갖다 주라고 설득했다고. 또한 하러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비나치화위원회에 참석해 증언을 해야 하기도 했다.
하러는 자신이 등반가로 명성을 얻자 일정부분 나치의 프로파간다로 이용되었으나 돈도 훈장도 받은 게 없다고 밝혔다. 그는 나치돌격대의 고위간부 임명이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으나 거절했다고 밝혔다.
"티베트에서의 7년이 나의 인생을 바꿨다"
▲ 하러의 자서전 <나의 인생>.
ⓒ Ullstein
하러의 가장 친한 친구인 14번째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Tenzin Gyatso)는 하러를 만나기 위해 2번이나 휘텐베르크를 방문했다. 첫 번째 방문은 하러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1992년에 있었고, 두 번째 방문은 90번째 생일을 맞던 2002년에 있었다.
하러는 늘 "티베트에서의 7년이 나의 인생을 바꿨다"고 말해왔다. 땅에 대한 관심으로 지리학을 공부했고 자연을 찾아 여행과 등반으로 늘 어디론가 떠났던 하인리히 하러는 7년도, 8년도 아닌 영원한 평온의 여정을 시작했다.
"나는 문명을 뒤로할 때, 안전하다고 느낀다."- 하인리히 하러

국가정보원은 한국 관광객의 티벳 지역 여행 자제를 권고하는 문건을 발표했다. 문건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1959년 3월 일어난 티벳 독립을 위한 시위를 무장폭동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한 시선은 현재 티벳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혈시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지 않을까 ?
브래드 피트 주연의 1997년 영화 '티벳에서의 7년(Seven Years In Tibet)'은 티벳 역사의 격변기를 담아내고 있다. 임신한 아내를 두고 히말라야 최고봉 중 하나인 낭가 빠르바트로 원정을 떠난 오스트리아 출신의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브래드 피트)는 기상 조건, 산사태 때문에 등정을 포기하고 산을 내려온다. 2차 대전의 발발로 전세계에 화마가 불어 닥치고 하인리히는 영국령 식민지였던 네팔에서 영국군에 의해 포로로 잡힌다.
겨우 영국군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하인리히는 티벳으로 숨어든다. 친절한 티벳인 관료의 도움으로 티벳에 머물게 된 하인리히는 티벳과 티벳인들을 알아가며 정을 나눈다. 그 과정에서 어린 달라이라마를 만나 우정을 쌓아나간다. 어린 달라이라마는 하인리히를 통해 고립된 티벳의 상황에서 알 수 없었던 바깥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하인리히는 어린 달라이라마를 통해 얼굴도 보지 못한 아들을 느낀다.
그러나 평화로웠던 생활도 잠시, 중국군의 침략으로 티벳에 점점 불안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결국 조용한 신비의 나라 티벳은 중국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중국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티벳에 중국의 오성홍기와 마오쩌둥의 사진이 걸리기 시작한다.
평화로움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티벳. 영화 속 티벳 역시 조용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로 가득 차있다. 영화 속 티벳인들은 항상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평정심을 잃지 않은 모습이다.
2008년 영화가 아닌 현실로 다시 한번 티벳이 우리들 앞에 섰다. 독립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 티벳과 오성홍기로 뒤덮인 영화 속 티벳. 티벳은 영화 '티벳에서의 7년'의 티벳에서 변화하려 하고 있다.
할리우드 배우 리차드 기어도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에 동조한다. 불교 신자이자 달라이라마와 친분이 두터운 리차드 기어는 한 해외 통신사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티벳을 탄압하면 베이징 올림픽을 보이콧 해야한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가수 비요크는 지난 2일 중국 상하이 공연에서 자신의 노래 '디클레어 인디펜던스(Declare Independence)'를 열창한 이후 "티베트"라고 외쳐 중국 정부를 당혹케했다.
자국 뉴올리언스 재건에 앞장서고 있는 브래드 피트는 '티벳에서의 7년'의 주인공으로서 아직 소식이 없다. 국정원의 여행 자제 권고 외에는 우리 정부도 언론도 조용하다.
한편 '티벳에서의 7년'의 실제 주인공 하인리히 하러는 지난 2006년 사망에 이르기까지 망명 생활 중이던 달라이라마와 변함없는 우정을 나눈 것으로 전해졌다.
[사진 = 영화 '티벳에서의 7년']
정경화 기자 chmong@mydaily.co.kr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press@mydaily.co.kr
모바일 마이데일리 3693 + NATE/magicⓝ/ez-i
- NO1.뉴미디어 실시간 뉴스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저작권자 ⓒ 마이데일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이런 말이 나온다. 등산 세계에서는 어떤가 이따금 생각해 본다. 세계의 고산 지대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산악인들의 생애를 볼 때 눈부신 활약을 한 사람일수록 자기 인생을 제대로 산 사람이 많지 않다.
산악인, 즉 등산가는 일상적·사회적 구속을 벗어나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삶을 사는 셈이고, 그들이야말로 건전한 심신을 가졌을 터이니 나무랄 데 없는 인생으로 보인다. 그런데 실은 그런 사람들이 제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애석하다.
이것은 특히 유명한 등산가들 이야긴데, 그들의 등산가로서의 능력이 불가항력적인 자연 조건에 부딪쳐 싸우다가 그 한계를 맞는 것은 보기에 너무나 처절하다. 오늘날 큰 업적을 남기고 세계 등반사에 발자취를 새긴 등산가 가운데 그런대로 장수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8000m 고소를 넘어선 '모리스 에르조그'와 에베레스트 남서벽 초등을 이룬 '크리스 보닝턴', 그리고 세기의 숙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을 해낸 '라인홀트 메스너' 등이 그런 점에서 대표적이다.
물론 알프스 개척기의 인물로서는 마터호른 초등으로 알프스 등반사의 황금기를 장식한 '에드워드 윔퍼'가 있으며, 여기에 알프스 벽시대를 개척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한 '리카르도 캐신'과 '하인리히 하러', 그리고 '발터 보나티'도 그 험난하고 위험한 여정을 끝까지 뚫고 달려간 인물들이다.
산악인의 한계라는 개념은 그 능력의 한계인 동시에 그들 생애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것은 등산가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들의 인생에 한계가 있다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준엄한 자연 조건에 자기를 투신하는 등산가 스스로 지니고 있는 한계가 있다는 적극적 의미다.
인생에서도 소극적 또는 적극적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각자가 결정하고 그 책임을 진다. 그런데 등산은 책임이나 의무감에서 하는 행위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율·자발적이다. 그러므로 세속적 구속이나 욕망이 따르지 않는, 말 그대로 자유불기(自由不羈)의 세계가 등산이다.
메스너의 수많은 저서 가운데 자유를 주제로 한 책이 있다. ‘Freiheit, aufzu Brechen, Wohin Ich Will(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는 자유)’가 그것인데, 이 이상 등산가의 의지와 행위의 자유를 설명한 글도 보기 드물다. 그리고 이 표현에는 등산가의 한계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이러한 자유로운 세계를 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혼자 알프스의 빙설벽을 누비던 '게오르그 빈클러'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의 등산가로서의 한계는 너무나 좁았다. 19세의 젊음을 알프스에 바쳤으니까.등산은 젊은이들의 특권인 의식과 행위의 세계다.
패기에 넘치고 사회적 구속이 덜한 세대인 만큼 그들의 세계로 돋보이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윔퍼가 마터호른에 도전했을 때, 그는 약관 20세였다. 윔퍼는 그야말로 칠전팔기 끝에 당시 알프스 최후의 보루였던 마터호른을 초등하는 성공했다.
그러나 하산 때 자일이 끊어지며 일행 7명 중 4명이 추락하는 엄청난 비운과 시련을 맞았다.이 불상사로 윔퍼는 그 젊은 나이에 알프스를 떠나 그린란드와 캐나다 등지를 전전하다 72세라는 등산가로서 쉽지 않은 긴 생애를 마쳤다.
등산 세계에서 화려하고 눈부신 성취보다 처절하고 비참한 불상사에 먼저 눈이 가고 마음이 끌리는 것은 인간의 정이리라. 그러한 불행한 사태는 등산의 역사 가운데 결코 적지 않으며, 그중 으뜸가는 사건도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이때 개인보다 팀 전체 사고가 돋보이는 것은 그 정황이 사람의 마음을 크게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등반대의 사고로 역사적인 것은 1865년 마터호른 참사를 비롯해서 1934년과 1937년의 낭가파르바트 대참사가 있다.
그러나 1936년 아이거 북벽에서 4명의 클라이머가 한꺼번에 희생된 사건은 등반사고 가운데서도 더 한층 처절한 인상을 남겼다. 낭가파르바트 때는 히말라야라는 오지에서 눈사태로 삽시간에 일어났으나, 아이거의 경우는 밑에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벽에 붙어살겠다고 악전고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일행 4명은 벽에서 합류한 20대 젊은이들이었다. 이밖에 등산 무대가 4000m 고소에서 8000m 고소로 이행하며 첫 희생자가 되었던 '앨버트 머메리', 1920년대 초엽 히말라야 개척기에 에베레스트에서 실종되어 20세기 최대의 신화로 남았던 '말로리'와 '어빙'과,
마터호른 북벽을 동계 초등한 '슈밋트 형제' 가운데 그 동생인 '토니 슈밋트'-그는 이듬해 그로세스 비이스바흐 북벽에서 추락했는데, 이들은 모두 젊음을 불사르고 근대 등산의 선구자의 길을 갔다. '프란츠 슈밋트'는 훗날 <자일을 묶은 동료>라는 책에서 동생 토니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한 사람의 쾌활한 청년의 종말은 너무나 빨랐고 어이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보다 길었어도 알맹이 없는 잿빛 일생의 끝과는 다르다’고. 이 말은 1948년에 태어나 1989년 로체 남벽에서 가기까지 초인적 등반활동을 벌였던 '예지 쿠쿠츠카'가 ‘긴 세월을 평범하게 살며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저 높은 데서 한 달 사이에 체험한다’고 했던 감회와도 통한다.
알피니즘에는 ‘한계도전’이라는 주제가 있다. 자연과 인간이 대립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조건의 한계가 있기 마련이나 여기 도전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한계 도전자를 특히 독일에서는 ‘Grenzganger’라는 용어로 부르는데 이 말을 가장 즐겨 쓰는 알피니스트가 바로 라인홀트 메스너가 아닌가 한다.
그만큼 메스너는 20세기 후반 젊은이로서 슈퍼알피니즘의 선구적 역할을 했는데, 등산가로서의 그의 한계는 능력과 수명 어느 모로나 많은 등산가 가운데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그 폭이 넓었다. 메스너의 저서에 <죽음의 지대>나, <나는 살아서 돌아왔다> 등 색다른 제목의 등반기가 있는 것도 그의 세계가 그만큼 남다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산악인의 한계는 산악인으로서의 의식과 행위에 따라 정해지고 좌우된다. 산악인이 산에서 한계에 도전할 때 그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헤르만 불은 낭가파르바트 단독 초등 때 등반보다 하산 도중에 그러한 정황에 부딪쳤다. 그가 남긴 오직 한 권의 책 <8000m 위와 아래>는 이때 기록으로 등반기 가운데 가장 돋보인다.
이러한 히말라야 개척기에 알프스에는 여전히 해결을 기다리는 과제들이 있었는데, 몽블랑 산군의 프레네 중앙릉은 그 중의 하나였다. 여기를 1961년 발터 보나티 일행이 도전했는데, 그는 산악인으로서 특이한 한계를 지닌 알피니스트였다.
강풍과 눈보라와 극도의 허기 속에서 6일 동안 오직 죽음과 싸운 보나티 일행 7명의 운명은 끝내 다섯이 죽고, 프랑스 팀의 리더였던 '피에르 마조'가 빈사 상태에 빠진 가운데 정상에 올라선 사람은 보나티뿐이었다.
보나티는 산을 언제나 체험의 장소로 보았다. 그는 ‘사람은 산을 오르고 또 오르지만, 우리 자신이 체험하고 그것이 우리 것이 되는 그 이상을 넘어설 수 없다’고 <나의 생애의 산>에 썼다. 익스트림 클라이머로서의 발터 보나티가 남다른 산악인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데는 이러한 그의 철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연과 인생, 산과 사람의 관계는 영원한 진리를 가진 주제요 대립이다. 그러나 산악인에게 산은 이러한 일반적 의미를 넘어서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한정된 인생을 살지만 산악인의 생애는 이러한 한정과는 거리가 있다. 인생은 원래 자연성을 띠는데 산악인의 생애는 인위적이다. 이것이 산악인의 한계의 특성이다.
/ 글 / 김영도 한국등산연구소 소장 / |
'사람...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사막을 건너와 꽃이 된 그녀 - waris dirie의 삶 (0) | 2009.03.04 |
---|---|
달라이 라마, 티벳의 영혼 (0) | 2009.03.02 |
김수환 추기경님 선종 (0) | 2009.02.17 |
닉 부이치치 (0) | 2009.02.15 |
메간 폭스 (0) | 2008.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