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63년간 여섯 임금을 섬긴 최지몽(崔知夢)

소금인형kgb 2009. 2. 12. 17:43

63년간 여섯 임금을 섬긴 최지몽(崔知夢)은 어떤 인물인가?

 

전남 영암지방의 호족인 원보(元甫) 최상흔(崔相昕)의 아들로써 최지몽(崔知夢)의 본명은 총진(聰進)이다.

그는 대호족의 자손임에도 항상 청렴 검소하고, 성품 또한 인자 온화하였으며,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

고려 초 대학자인 대광(大匡) 현일(玄一)에게 사사를 받아 경서와 사서를 널리 섭렵했으며,

더욱이 천문과 역술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18세에 태조(왕건)가 그 명성을 듣고 불러 꿈을 해석케 했더니,

반드시 삼한을 통일할 것이라고 하여 태조는 이에 크게 기뻐하며 지몽으로 이름을 고치게 하고 비단옷을 내리고

공봉(供奉)으로 임명하여 관직에 등용되어 81세에 임종 때까지 관직에 있었든 인물이다.

 항상 왕을 따라 종군해 그 옆을 떠나지 않았으며, 삼한을 통일한 후에 궁중에 입시해 왕의 자문에 대비했다.

 혜종 2년에 왕규(王規)가 왕의 아우를 모함하려 할 때 최지몽은 사천관(司天官)으로 있으며 왕에게 류성이 자미를 범 했으니

나라에 필시 역적이 생길 것입니다. 라고 하여 혜종으로 하여금 방비케 하였으며,

후에 혜종이 병에 걸려 신덕전에 누워있고 왕규가 모반하려 할 때도 최지몽이 점을 쳐 보고 근자에 변이 있을 터이니

수시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 하여 변을 모면케 했다고 한다.

 

혜종의 병사후에 정종(왕요)가 즉위하여 왕규를 제거 한 후 왕규의 역모를 미리 예측하여 방비케 한 최지몽의 공을 표창하고 중히 여겼다고 한다.

광종 때 왕(광종)을 따라 귀법사에 갔을때 술에 취해 왕에게 큰 실수를 저질러 이로 인하여 외걸현(隈傑縣)으로 좌천되어

외지에서 11년을 지낸 것이 일생에서 유일한 외직 이였으나 관직을 계속 유지 하고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왕이라 할지라도 그를 쉽게 제거 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그 힘이라 함이 군사력이나 파벌을 이루어 세를 규합하거나 작당을 한 힘이 아니라 

역술과 천문을 포함한 높은 학문의 힘과 평소 청렴하고 온화한 인품으로 얻은 것이란 점이다.

 

광종 사후 경종 5년에 다시 중앙으로 소환돼 대광(大匡), 내의령(內議令)과 동래군후(東萊郡候)의 봉작과 식읍 1천 호를 받았다고 한다.

하루는 최지몽이 말하기를 객상이 황제의 좌를 침범했으니 바라건대 왕(경종)께선 숙위를 신중히 경계하셔서 불의의 변을 방비토록 하기를 청 허였드니

 얼마 후 왕승(王丞)등이 모반을 꾀하고 있음을 미리 알아 제압한 후 왕의 신임은 날로 두터워졌다.

 

성종이 다음 왕위에 올라 좌집정수 내사령 상주국(左執政守 內史令 上柱國)을 더 주고,

홍문숭화치리공신(弘文崇化致理功臣)의 칭호를 내려 주었으며 그 부모에게 까지 벼슬을 줬다고 한다.

 성종 3년 최지몽의 수가 78세가 되매 세 번 표를 올려 사직하길 청했으나 윤허치 않았다. 또 글을 올려 청하니,

조회에 참석은 그만두고 내사방에 나가서 그전대로 일을 보도록 명했다.

성종 정해(丁亥) 6년(글안 통화 5년, 송 옹희 4년: 서기 987년)에 최지몽이 와병하니 성종은 의원에 명해 약을 주며

 친히 그 집에 가서 문병하고 말 두 필을 귀법사와 해안사에 희사해 중 3천 명에게 밥 먹이며 기도케 하는 등

무릇 병을 치료할 만한 일이라면 안 한 것이 없었으나, 그는 봄 3월 갑자(甲子)일에 81세로 사망 하였다.

왕이 부고를 받고 깊히 애도하여 부의로 베 1천 필, 쌀 3백 석 ,보리 2백 석, 차 2백 각, 향 20 근을 내려 주고,

 관비로 장사를 치렀다고 한다.

태자태부(太子太傅 를 추증하고 시호는 민휴(敏休)라 했으며 또 태사(太師)를 더 추증하고, 성종 13년에 경종의 묘정에 배향됐다.

 

 

여기서 우리가 최지몽이 어떻게 18세에 등용이 되어 여섯 임금을 거치면서 81세에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왕의 측근으로 있을 수가 있었는지 다른 각도에서 살펴 보기로 한다.

 

근세에 들어서도 일본에선 영화, 소설, 만화 등으로 각색되어 많은 사람들을 신비의 세계로 푹 빠지게 하고 있는 헤이안 시대를

풍미했던 음양사인 세이메이(聖明)라는 인물이 있다. 일반사람들보다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가올 미래의 위기를 예고하며 그 위기를 순간순간 물리치는 그들은 일반 세인들에게 신비롭고도 존엄한 존재로 인식되어졌고,

그것은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일본인들이 저 토록 신성시하며 떠 받들고 있는 세이메이(聖明)의 직첵이 였든 음양사는 헤이안시대의 하나의 관직으로써

우주의 이치와 섭리를 크게 음 과 양으로 구분하여 그 우주의 바탕이 되는 신(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을 담당하였다.

또한 천문을 관측하고 역술을 통해 앞날을 점치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을 괴롭히는 요괴나 잡신들을 물리치는 퇴마를 행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통틀어 음양도(陰陽道)라고 했으며, 그 일을 담당하는 이들을 음양사라고 하는 것이다.

음양사는 궁극적으로 일본 왕실의 안위를 담당하였고, 국가적인 중대사를 결정짓는데 결정적인 역할과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일반 세인들에게 신비롭고도 존엄한 존재로 인식되어졌고, 그것은 지금에까지 신성시 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세이메이와 최지몽이 동시대의 인물이며 같은 관직에 종사하며 일생을 왕의 측근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의 헤이안시대의 음양사라는 직책은 같은 시기의 고려의 사천관(司天官)이라는 관직이 맡은 소임이나 주변에 끼친 영향과

백성들에까지도 절대적인 추앙을 받아온 점등이 동일하다는 사실이다.이 사천관은 사천대(司天臺)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고려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사천관으로는 민휴공 최지몽(907~987)이란 사실이다.

921년에 태어난 세이메이보다  14년 정도 빠른 최지몽의 일생과 세이메이의 그것과는 너무나 흡사하며,

 동시대의 동일한 문화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점 또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최지몽은 정치가로서 명성을 떨치는 한편, 천문 지리와 복술에 정통하여 사천대의 사천관으로서도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정치성과 권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면서 또한 뛰어난 영적 능력까지 겸비한 그는 일본인들이 저렇게 한 덩어리가 되어

떠 받들고 있는 세이메이보다 훨씬 뛰어나고 앞섰든 당대의 최고의 천재였으며, 뛰어난 정치가였으며,

또한 나라를 지키는 역술가이며 천문학자 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뛰어난 인물을 통하여 역사와 선조들을 귀히 여기고 전통으로 이어 다양하게 변모되어 어느 방향으로 튀어버릴지 모를

근세문화의 한 끝 자락이나마 한자리에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일본인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보다 더 우수한 사상이나

학문을 가지고 있든 우리의 조상들을 깨우치고 중히 여기는 전통이 아쉽지 않은가?